저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복수 전공하기 전까지 라틴어를 배워봤자 쓸 데도 없고, 그냥 성당이나 해리포터에 나오는 주문 같은 것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역사와 영어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 판단이 꽤 성급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라틴어는 사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곳곳에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라틴어의 기원,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
라틴어는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 family)에 속합니다. 인도유럽어족이란 유럽과 남아시아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한 언어들의 공통 조상 계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영어·독일어·힌디어까지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현재 기록된 가장 오래된 라틴어 문장은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망토를 고정하는 핀에 새겨진 "Manios me fhefhaked Numasioi"라는 문장인데, "마니우스가 누메리우스를 위해 나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2,600년 전 핀에 새긴 문장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니 놀랍지 않은가요?
라틴어는 티베르강 하류 근처에 살던 소규모 집단에서 출발해 로마 제국(Roman Empire)의 팽창과 함께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일부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라틴어는 단일한 형태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크게 세 가지 형태가 공존했습니다.
- 고전 문어 라틴어(Classical Written Latin):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같은 문인들이 사용한 격식체
- 고전 연설 라틴어(Classical Oratorical Latin): 연설과 의회에서 쓰인 수사적 형태
- 일상 구어 라틴어(Ordinary Colloquial Latin): 시장과 골목에서 실제로 쓰인 말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일상 구어 라틴어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속라틴어(Vulgar Latin, 구어체 라틴어)로 발전했습니다. 속라틴어란 문학적 규범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이 실제로 사용하던 라틴어의 구어 변형체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 속라틴어가 오늘날 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등 로망스어군(Romance Languages)의 직접적인 조상입니다. 로망스어군이란 속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들의 집합을 말하며, 전 세계 약 8억 명 이상이 모국어로 사용합니다.
라틴어는 어떻게, 얼마나 천천히 쇠퇴했는가
모든 언어가 그렇듯 라틴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역사학자들은 대략 600~750년 사이를 라틴어가 사실상 일상 언어로서 기능을 잃은 시점으로 봅니다. 로마 제국이 약해지면서 문해율(literacy rate)이 급격히 떨어졌고, 각 지역에서는 속라틴어가 변형된 지역 언어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문해율이 급락하면서 라틴어 문어 전통을 이어갈 사람 자체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라틴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 768-814년)가 교육을 장려하면서 일시적인 부흥기를 맞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라틴어 문헌 전통이 유지되었습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수많은 학자와 교수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다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전 라틴 문학이 재조명되면서 또 한 번 부흥의 기회를 맞았고, 과학 용어들이 라틴어를 기반으로 표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놀랐던 점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대학 교육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이수가 필수였다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와 함께 라틴어 교육이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라틴어가 교육 현장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60~70년 전의 일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최근 이야기입니다.
시카고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라틴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다는 독일인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둘이서 중고 서점에 가 라틴어 교재를 한 권씩 사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느낀 건 라틴어가 단순히 어렵다기보다는 "이걸 어디에 쓰지?"라는 의문이 먼저 앞선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모국어로 라틴어를 쓰던 사람들의 일상 회화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상상해 봤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격식체 텍스트처럼 딱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어는 항상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연하게 흘렀을 테니까요.
라틴어의 흔적, 우리가 매일 쓰는 단어 속에 있다
라틴어의 영향은 로망스어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조사하면서 놀랐던 것은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쓰던 단어들의 출처가 라틴어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alibi(알리바이): 라틴어로 "다른 곳에"를 의미
- bonus(보너스): "좋은"을 뜻하는 라틴어 bonus에서 직접 유래
- versus(대결, ~대): "돌아선, 향하는"을 뜻하는 라틴어 동사에서 파생
- status quo(현상 유지): "현재 상태"를 의미하는 라틴어 표현
- impromptu(즉흥적인): "준비 없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
alibi나 versus 같은 단어를 단순히 "영어에 있는 독특한 표현"으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라틴어 그 자체였습니다. 이 단어들이 제국의 흥망과 흑사병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지금 제가 일상에서 쓰고 있다는 사실이 참 미묘합니다.
언어의 음운 변화를 추적하는 비교언어학(comparative linguistics) 분야에서는 이런 흔적들을 역추적해 과거 언어를 재구성하는 작업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교언어학이란 서로 관련 있는 언어들을 비교 분석하여 공통 조상 언어나 그 특성을 복원하는 학문입니다. 라틴어의 경우 이미 방대한 문헌 자료가 남아 있어서 현존하는 로망스어들과의 비교를 통해 당시 발음과 문법 구조까지 상당 부분 재구성이 가능합니다. 라틴어의 발음은 이제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많은 파생 언어들이 남아 있다면 역추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언어학자들이 라틴어를 완전한 사어(dead language)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어란 더 이상 모국어로 사용하는 화자가 없는 언어를 의미하는데, 라틴어는 모국어 화자는 없지만 그 구조와 어휘가 현재 수억 명이 사용하는 언어들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라틴어의 "사망 시각"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오히려 라틴어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 졌습니다. 시카고 중고 서점에서 샀던 그 교재를 다시 꺼내볼 생각은 아직 없지만, 적어도 alibi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기원전 로마의 어느 골목이 잠깐 떠오를 것 같습니다. 언어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작은 단어 하나가 계속 쓰이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라틴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