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슬랭 (사회적 기능, 생성과 소멸, 언어별 특징)

by jaru0418 2026. 6. 1.

여러분은 유행어 혹은 슬랭을 잘 아시는 편인가요? 저는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한국어 유행어를 얼마나 아는지 테스트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아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해외 생활을 하며 한국 콘텐츠 접촉이 적은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20대인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언어에는 슬랭이 있습니다. 예외 없이 어떤 언어 공동체든 공식적인 표준어 바깥에 자기들만의 말을 만들어냅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과 공동체를 만드는 수단이고, 슬랭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슬랭의 사회적 기능

슬랭이 왜 생겨나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단순히 "재미있어서" 쓰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로는 꽤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언어학에서는 슬랭을 사회방언(sociolect)의 한 형태로 분류합니다. 사회방언이란 특정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언어 변이를 가리키는 말로 표준어와는 다른 어휘·발음·문법 체계를 갖습니다. 슬랭은 사회방언 안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핵심은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의 구분입니다. 여기서 내집단이란 특정 언어 표현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알아보는 집단을 뜻합니다. 어떤 슬랭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단순한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 집단의 사람이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행위입니다. 이 기능 때문에 슬랭은 나이, 민족성, 국적, 사회계층 등 다양한 정체성 요소를 기반으로 형성됩니다.

 

역사적으로 슬랭을 활발하게 만들어온 집단들을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에서 유래한 African American Vernacular English(AAVE)
  • 성소수자 공동체의 은어 문화
  • 특정 청소년 세대가 공유하는 또래 언어
  • 직업군이나 취미 집단의 전문 은어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일수록 자기들만의 언어를 강하게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고, 내부에서 유대감을 높이는 기능을 언어가 수행하기 때문입니다.(출처: Linguistic Society of America)

 

저는 영어 슬랭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한국인 친구를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단어를 아는 것과 그 단어가 어느 집단에서, 어떤 맥락에서, 어떤 뉘앙스로 쓰이는지까지 아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언어 이해입니다. 단어 뒤에 사람이 보이는 것, 그게 슬랭을 이해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슬랭의 생성과 소멸

슬랭은 어떻게 생겨나고, 왜 그렇게 빨리 사라질까요? 

 

가장 흔한 경로는 의미 전이(semantic shift)입니다. 의미 전이란 기존에 있던 단어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cool'은 14세기부터 "차가운"이라는 뜻이었지만, 1930년대 미국 흑인 영어에서 "멋진"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ghost' 역시 유령이라는 본래 의미에서 출발해 오늘날에는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행위를 뜻하는 동사로 쓰입니다. 'wicked'도 마찬가지로 "사악한"에서 "굉장한"으로 뒤집혔습니다. 또 다른 경로는 약어(abbreviation)입니다. SNS와 메신저 문화가 확산되면서 IYKYK(If You Know, You Know), YOLO(You Only Live Once), OOTD(Outfit Of The Day) 같은 약어형 슬랭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그렇다면 슬랭은 왜 빨리 사라질까요? 슬랭이 너무 널리 퍼지면, 그 순간 힘을 잃습니다. 정치인이 쓰기 시작하거나, 기업 광고 카피에 등장하는 순간 "더 이상 우리만의 언어"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언론이 그 슬랭의 뜻을 기사로 설명하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에서는 매년 '올해의 청소년 단어'를 선정하는데, 선정 발표가 나올 무렵이면 이미 해당 표현은 유행이 지나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물론 살아남는 슬랭도 있습니다. "술"을 뜻하는 'booze'는 14세기에 등장한 슬랭이지만 지금도 쓰입니다. "팁을 주다"라는 의미의 'tip'은 18세기 초에는 슬랭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한 표준 어휘가 되었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슬랭은 결국 구어체나 표준어의 일부로 편입됩니다. 슬랭이라는 단어 자체도 원래는 도둑이나 부랑자들의 언어를 가리키던 말이었다는 점이 제게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언어별 슬랭의 특징

언어마다 슬랭을 만드는 방식도 다릅니다. 이 부분이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입니다. 

 

프랑스어에는 'Verlan'이라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Verlan이란 단어의 음절 순서를 뒤집어 새로운 슬랭 어휘를 만드는 기법으로 예를 들어 '화난'을 뜻하는 énervé가 vénère로 바뀌는 식입니다. 독일 청소년 슬랭은 영어, 터키어, 아랍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Kiezdeutsch'라는 독특한 혼합 언어 변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Kiezdeutsch는 이주민 배경의 청소년들이 많이 사는 도시 지역에서 발달한 도시 방언으로 단순한 외래어 차용을 넘어 문법 구조 자체가 섞인다는 점이 특징입니다.(출처: Leibniz-Zentrum Allgemeine Sprachwissenschaft)

 

일본어 슬랭은 영어 단어를 일본어 발음으로 줄여 쓰는 방식이 많습니다. 같이 일하는 일본인 동료가 '냄새로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スメハラ(스메하라)'라고 부른다고 알려준 적이 있습니다. smell과 harassment를 합친 말인데, 영어 화자들은 정작 쓰지 않는 표현을 일본어 슬랭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구조를 화제영어(和製英語), 즉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영어 기반 표현이라고 부릅니다. 영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일본어인 셈입니다.

 

중국어(만다린)에서는 숫자 조합이 슬랭이 되기도 합니다. 숫자 1314의 발음이 '一生一世(yīshēng yīshì, 평생)', 즉 "영원히"와 비슷하게 들린다는 점을 활용한 것입니다. 호주 영어는 단어 끝에 -y, -ie, -o를 붙여 줄이는 방식을 즐겨 씁니다. present가 prezzie, musician이 muso가 되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모지도 슬랭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해골 이모지(💀)가 "너무 웃겨서 죽겠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언어별 슬랭이 만들어지는 주요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의미 전이: 기존 단어에 새로운 뜻을 부여 (cool, ghost, wicked)
  • 약어화: 긴 표현을 줄여 사용 (YOLO, IYKYK)
  • 음절 도치: 단어 음절 순서를 뒤집음 (프랑스어 Verlan)
  • 외래어 혼합: 다른 언어 어휘를 결합하거나 변형 (일본어 화제영어, 독일어 Kiezdeutsch)
  • 숫자·기호 활용: 발음 유사성이나 시각적 연상을 이용 (중국어 1314, 이모지 슬랭)

슬랭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언어가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말에 깊이 공감이 갑니다. 새로운 단어가 계속 생겨나고, 어떤 단어는 사라지고, 어떤 단어는 표준어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 흐름 안에 그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슬랭을 안다는 건 어휘를 아는 것 이상입니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집단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지까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저처럼 슬랭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편이라도, 적어도 왜 그런 말이 생겨났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언어를 보는 시야가 꽤 달라집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다면, 단어장보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일상에 귀를 기울여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blog.duolingo.com/slang-all-languages/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