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 학원에서 듣기 평가 오답지를 받아 들고 멍하니 앉아 있던 날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다른 단어들은 들렸는데 유독 동사만 안 들렸습니다. 그때는 그냥 집중력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언어 구조 자체가 제 뇌의 집중 패턴을 통째로 관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어구조가 다르면 집중하는 위치도 다르다
일반적으로 영어 실력이 부족하면 단순히 어휘나 문법이 부족한 탓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교환학생을 준비하며 토플 학원을 다니던 시절, 제 오답 패턴을 뜯어보니 단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동사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제 귀가 반응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왜 일어나는지는 통사 구조(syntax)를 이해하면 설명이 됩니다. 통사 구조란 문장 안에서 주어, 동사, 목적어가 배열되는 방식을 말합니다. 한국어는 SOV, 즉 주어-목적어-동사 순서입니다. "나는 사과를 먹는다"처럼 동사가 맨 끝에 옵니다. 반면 영어는 SVO, 즉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라 "I eat an apple"처럼 동사가 앞쪽에 위치합니다.
전 세계 약 7,000개 언어 중 SOV 구조는 약 45%, SVO 구조는 약 42%를 차지합니다(출처: Pangeanic Language Solutions). 한국어처럼 동사가 끝에 오는 언어에 익숙한 사람은 문장 후반부에 집중력이 몰리도록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영어 문장을 들을 때 동사가 나오는 중간 지점에서 뇌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인 겁니다. 저의 듣기 오답은 집중력 부족이 아니라, 제 뇌가 한국어 어순으로 세팅된 결과였습니다.
어순 유형별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SOV(주어-목적어-동사): 한국어, 일본어, 터키어 등. 동사가 끝에 오므로 문장 끝에 집중력이 강화
- SVO(주어-동사-목적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동사가 앞쪽에 오므로 초반부터 의미 파악 가능
- VSO(동사-주어-목적어): 아일랜드어, 고전 아랍어 등. 행동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구조
기억방식까지 바꾸는 좌분지와 우분지
어순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분지 방향(branching direction)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분지 방향이란 수식어나 종속절이 핵심 명사나 동사 앞에 붙는지, 뒤에 붙는지를 가리키는 언어학 개념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좌분지 언어(left-branching language)입니다. 좌분지 언어란 꾸며주는 말이 핵심 단어 앞에 위치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어제 친구가 사준 책"처럼 핵심 단어인 '책'이 맨 끝에 옵니다. 반대로 영어는 우분지 언어(right-branching language)로, 핵심 단어 뒤에 수식어가 붙습니다. "the book that my friend bought yesterday"처럼 'book'이 앞에 먼저 나옵니다.
2018년 연구에 따르면 이 분지 방향의 차이가 기억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좌분지 언어 사용자는 문장 앞쪽 정보를 더 잘 기억하고, 우분지 언어 사용자는 문장 뒤쪽 정보를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출처: ScienceDirect). 이 효과는 언어 처리에만 그치지 않고 공간 인지나 숫자 처리 방식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머릿속에서 먼저 목적어가 떠오르고, 동사를 나중에 꿰맞추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다가 중간에 멈추고 동사를 다시 찾는 그 어색한 공백이 당시에는 너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게 사실은 좌분지로 설계된 뇌가 우분지 언어를 출력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이었던 셈입니다.
사피어-워프 가설로 읽는 한국인의 결론 먼저 말 안 하는 습관
이 모든 경험이 언어학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온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입니다.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강한 버전은 현재 학계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약한 버전, 즉 언어 구조가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개념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꾸준히 지지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가설의 약한 버전은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 회의나 발표에서 결론을 맨 마지막에 꺼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영어권 화자들은 두괄식으로 핵심을 먼저 말하는 방식이 자연스럽다는 점도 이 어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어의 어순이 소통 스타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호주 원주민 언어인 Guugu Yimithirr는 좌/우 개념 없이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표현합니다.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절대적 방향 감각이 매우 발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어에 없는 개념은 인식도 희미해지고, 언어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은 인지 능력으로 강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익숙하지 않은 어순의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결국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해리포터를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유추하며 계속 읽었고, 시리즈를 다 읽고 나니 어느 순간 영어 어순이 자연스러워져 있었습니다. 억지로 규칙을 외운 게 아니라, 언어 구조 자체가 뇌에 쌓인 결과였습니다. 역시 언어는 듣고 읽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언어 구조가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언어를 배우고 어떤 표현을 쓰느냐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조금씩 바꿔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언어 습관이 사고를 부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단순한 자기 계발 클리셰가 아닐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언어학 연구가 더 축적될수록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언어와 인지의 연결고리가 더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발견들이 교육 방식이나 다문화 커뮤니케이션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참고: https://blog.pangeanic.com/how-word-order-shapes-our-thoughts-and-mem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