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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잊는다는 것 (언어 망각, 헷갈림, 언어 마모 지연)

by jaru0418 2026. 5. 28.

영어로 대화하다가 갑자기 한국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잠깐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피곤한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반복되다 보니 '혹시 한국어를 잊어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모국어를 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게 진행됩니다.

언어 망각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언어를 잊는다고 하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말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다릅니다. 언어학에서는 이 현상을 언어 마모(language attrition)라고 부릅니다. 언어 마모란 특정 언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해당 언어 능력이 점진적으로 약화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집을 오래 방치하면 지붕부터 조금씩 무너지듯, 언어도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서서히 침식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모가 일어나는 순서입니다. 어휘, 즉 개별 단어가 가장 먼저 흐릿해지고, 문법과 발음은 상당히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산출 능력, 그러니까 말하거나 쓰는 능력보다 수용 능력, 즉 듣거나 읽어서 이해하는 능력이 훨씬 더 오래 유지됩니다. 제가 영어로 대화하다 한국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 어휘 마모의 초기 신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저는 가족들과 꾸준히 한국어로 통화하고 있어서 완전한 마모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연구에 따르면 언어 마모 속도는 나이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성인에 비해 언어를 훨씬 빠르고 완전하게 잊습니다. 어린 시절 입양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유아기에 모국어 환경을 떠난 이들은 해당 언어를 전혀 배운 적 없는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소리를 인식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면 성인이 된 이후 이민을 간 경우에는 뇌가 모국어를 훨씬 끈질기게 붙잡습니다.

헷갈림: 코드스위칭과 언어 갭

저는 처음에 제 경험이 언어를 잊어가는 증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찾아보니 잊는 것과 헷갈리는 것, 두 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것은 코드스위칭(code-switching)과 언어 갭(language gap)입니다.

 

코드스위칭이란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가 대화 중에 언어를 전환하거나 혼용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영어로 한참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한국어 단어를 꺼내야 할 때 뇌가 언어 모드를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그래서 잠깐 단어가 안 떠오르는 것은 언어를 잊어서가 아니라 전환 지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언어를 잊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영어로 말할 때는 자연스러운데, 그걸 한국어로 번역하려니 도저히 어색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특유의 뉘앙스나 표현이 한국어에 없을 때 생기는 간극이 바로 언어 갭입니다. 이것도 언어를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 언어가 서로 다른 개념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제가 경험하는 것들은 대부분 이 두 범주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장기적으로 언어 마모로 이어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요.

 

중요한 것은 이 두 현상이 언어 마모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잊어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헷갈리는 것'이라고 안심하다가 실제 마모가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언어 사용 패턴을 꾸준히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언어 마모 지연: 언어를 붙잡아두는 것들

그렇다면 언어 마모를 늦추는 데 실제로 효과가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제 주변 경험과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해당 언어와 연결된 감정: 긍정적이고 강한 감정적 유대가 있을수록 언어를 오래 유지합니다. 반대로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얽혀 있으면 오히려 더 빨리 잊을 수 있습니다.
  • 언어 숙련도: 이미 높은 수준으로 익힌 언어는 잊기 어렵습니다. 배우는 언어도 마찬가지로, 숙련도가 높을수록 마모에 강합니다.
  • 사용 맥락의 다양성: 직업, 친구 관계, 취미 등 다양한 상황에서 언어를 쓸수록 유지력이 높아집니다.
  • 이중언어 교육: 이민 가정 아이들에게 현지 언어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 현지 언어 습득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연구 결과는 그 반대를 가리킵니다. 모국어와 현지 언어를 함께 유지하는 이중언어 환경이 학업 성취도와 정서 건강 모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출처: American Speech-Language-Hearing Association).

제 친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중국에서 살다 온 그 친구는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미 중국어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중국어 수업을 들을 때 성조 구분만은 정말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성조란 음의 높낮이 변화로 단어의 의미를 구별하는 중국어의 핵심 음운 체계입니다. 언어 대부분은 잊었지만 뇌 어딘가에 음운 체계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어릴 때 언어를 잃은 사람들이 그 언어를 다시 배울 때 처음 배우는 사람보다 속도가 빠르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친구가 바로 그 살아있는 예시처럼 느껴졌습니다.


모국어조차 조건이 맞으면 잊힐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느리고, 흔적은 생각보다 오래 남으며, 다시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힘들게 익힌 언어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저도 가족과의 통화, 한국어 콘텐츠 소비 같은 작은 습관들이 언어를 붙잡아두는 닻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언어 마모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도, 속도를 늦추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참고: https://blog.duolingo.com/can-you-forget-your-first-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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