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자기 이름을 여섯 가지 다른 철자로 적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대학 강의에서 접했을 때 황당했습니다. 영어 단어 시험에서 'e' 하나 빠뜨려 틀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인 지금, 과거에는 철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철자법이란 게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사실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약속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나면 허탈해지기도 합니다.

표준화 배경: 철자 규칙은 왜, 언제 생겼나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수천 년 전이지만, 표준 철자법(standardized orthography)이 자리 잡은 건 고작 수백 년 전입니다. 여기서 표준 철자법이란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올바른 철자 표기를 정해놓은 규범 체계를 말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독자가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면 어떻게 적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철자법은 언어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실제로는 정치적 맥락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민족주의(nationalism)가 부상하면서 표준화가 본격화되었습니다. 민족주의란 언어·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 국가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는 사상으로 이 흐름 속에서 통치 권력은 하나의 통일된 언어 규범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표준'으로 채택된 언어는 대부분 그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계층이 쓰던 언어였습니다. 문해율(literacy rate)이 극히 낮던 시대에 글쓰기는 귀족과 성직자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의 표기 방식이 곧 기준이 되었습니다. 문해율이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인구 비율을 뜻하며, 역사적으로 이 수치가 낮을수록 문자 언어의 표준화는 지배층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철자법은 언어학적 합리성보다 사회적 권력관계를 더 많이 반영한다는 것, 이게 제가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입니다.
언어별 비교: 350년의 간격이 말해주는 것
제가 이 자료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유럽 언어들 사이의 철자법 표준화 시점 차이였습니다. 같은 유럽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언어들인데도 표준화 시기가 무려 500년 가까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탈리아어: 1583년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Accademia della Crusca) 설립, 1612년 첫 사전 출판
- 프랑스어: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설립, 1694년 첫 사전 출판
- 스페인어: 1713년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Real Academia Española) 설립
- 영어: 1755년 새뮤얼 존슨의 사전, 1828년 노아 웹스터의 미국식 사전
- 독일어: 1880년 두덴(Duden) 출판
- 아일랜드어: 1958년 《An Caighdeán Oifigiúil》 출판
이탈리아어 철자법 표준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 16세기에 이뤄진 것은 르네상스의 영향이 큽니다. 단테와 보카치오 같은 토스카나 문인들의 작품이 문어(literary language)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이를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문어란 구어와 달리 주로 글로 쓰이는 언어 형식을 말하며, 이탈리아의 초기 표준화는 일반 대중보다 작가와 지식인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표준화의 목적이 소통의 편의가 아니라 엘리트층의 글쓰기 규범 확립이었던 것이 흥미롭습니다.
반면 아일랜드어는 1958년이 되어서야 공식 표준이 마련되었습니다. 12세기부터 700년 넘게 이어진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아일랜드어 사용 자체가 대폭 위축되었고, 언어를 되살리는 일이 먼저였기 때문에 표준화는 자연히 뒤로 밀렸습니다. 이탈리아어와 아일랜드어의 표준화 시점이 약 350년 차이라는 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두 언어가 걸어온 전혀 다른 역사적 경로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영어의 경우는 또 다릅니다. 프랑스나 스페인과 달리 공식 언어 기관 없이 사전 편찬자와 인쇄업자들이 주도적으로 표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가 'colour'와 'color', 'criticise'와 'criticize'처럼 철자 면에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우리 맞춤법은 언제 생겼을까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한국어 철자법은 언제 정립된 걸까 하는 겁니다. 저도 이 자료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찾아봤습니다.
한국어 맞춤법 표준화의 결정적 계기는 1933년입니다.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근대적 맞춤법 체계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활동한 학술 단체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언어 표준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출처: 국립국어원). 그 이전에는 동일한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맞춤법은 1988년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시한 '한글 맞춤법'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규범은 국립국어원이 관리하며, 지금도 사회 변화에 맞춰 조금씩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맞춤법을 틀리면 요즘 온라인에서 꽤 가혹한 시선을 받습니다. '맞춤법을 못 지키는 사람은 무식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100년 전까지만 해도 표준 맞춤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 시선이 얼마나 최근에 생겨난 기준인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한글 맞춤법이 정립되기 이전 시기의 문헌을 찾아보면, 지금과 사뭇 다른 표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틀린 맞춤법이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틀렸다고 하지 않았던 표기들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맞춤법 검사기를 본다면 얼마나 당황할지, 상상만 해도 재밌습니다.
철자법이란 결국 어느 시점에 누군가 정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존재했던 절대적 규칙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둘 만합니다. 영어 단어 시험에서 'e' 하나 빠뜨려 커트라인을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셰익스피어가 자기 이름을 여섯 가지로 적었다는 사실은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