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가르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선생님, 이 글자는 왜 발음 안 해요?" 6~8세 아이들 앞에서 제가 제일 하기 싫었던 말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원래 그래." 그 말을 내뱉고 나면 찜찜하고 선생님으로서의 도리를 못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영어 묵음이 왜 생겼는지 제대로 파고들어 봤고, 알면 알수록 꽤 복잡한 역사가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은 침묵하는 글자들, 대모음 추이 이전에는 다 소리가 있었다
묵음(silent letter)이란 철자에는 존재하지만 실제 발음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 글자를 말합니다. 영어 단어의 약 60%에 묵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묵음 글자들은 원래 실제로 발음이 됐습니다.
그러던 중, 중세 영어 시기에 대모음 추이(Great Vowel Shift)라는 음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대모음 추이란 14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영어의 장모음 발음 체계 전체가 연쇄적으로 바뀐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knight"는 한때 "kniht"처럼, "bite"는 "beetuh"처럼 발음되었습니다. 발음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쉽게 변화하는 반면 철자는 보수적으로 시간에 걸쳐서 변화하기 때문에 거의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아는 철자와 발음의 불일치가 완성된 겁니다.
저도 영어를 공부하면서 이런 단어들 때문에 꽤 고생했습니다. 영어를 처음 접하는 분들 중에도 이런 경험을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에 가깝습니다.
묵음의 발생 경로, 하나가 아니다
묵음이 왜 생겼냐고 물으면 대모음 추이만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여러 경로가 있습니다.
묵음이 만들어진 주요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모음 추이로 인한 발음 변화: 발음은 바뀌었지만 철자가 그대로 굳어진 경우
- 외래어 수입: 음운 규칙이 다른 언어에서 단어를 빌려오면서 발음 불가능한 철자 조합이 생긴 경우
- 인쇄업자와 학자들의 자의적 철자 변경: 자국어 철자 관습이나 어원을 강조하기 위해 글자를 추가한 경우
외래어 수입 예시: 외래어 경로를 보면, "tsunami"는 일본어에서, "psychology"는 그리스어 "psyche(영혼)"와 "logica(학문)"에서 온 단어입니다. 영어의 음운론(phonology)에서는 단어 시작 부분에 "ts"나 "ps" 같은 자음 조합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음운론이란 언어에서 소리가 어떻게 조직되고 기능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를 말합니다. 그 규칙에 맞추다 보니 앞 글자가 묵음으로 처리된 것입니다.
자의적 철자 변경 예시: 제가 이번에 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인쇄업자와 학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당시 인쇄업자 중에는 네덜란드나 독일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이 자기 나라 언어처럼 보이도록 철자를 손댔다는 겁니다. 또한 학자들은 "doubt"라는 단어에 라틴어 어원인 "dubitare"를 드러내기 위해 묵음 "b"를 끼워 넣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자음 하나가 그렇게 자리를 잡아버린 셈입니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발음 기호를 배우면 달라진다
묵음 때문에 영어 발음이 어렵다는 건 영어를 외국어로 공부하는 사람뿐 아니라 원어민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즐겨 보던 미드에서는 대학 강의 도중 교수가 "chameleon"이라는 단어를 책으로만 읽어왔기 때문에 실제 발음을 전혀 몰랐고, 강의 중에 이상하게 읽어서 학생들에게 놀림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 친구도 "sword"의 "w"가 묵음인 줄 모르고 자신 있게 "스워드"라고 발음했다가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묵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온라인 사전의 발음 듣기 기능을 활용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국제 음성 기호인 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를 배운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됐습니다. IPA란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국제음성학회가 제정한 표준 발음 기호 체계를 말합니다. 기호를 익혀두면 사전에서 단어를 검색했을 때 소리를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정확한 발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디오보다 기호가 더 정확한 이유는, 발음은 화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지만 IPA 표기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불규칙한 발음 체계에 대해 영어를 더 단순하게 개혁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오히려 그 복잡함이 영어의 어원적 풍부함을 보여준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단어를 올바르게 발음했을 때의 쾌감이 있습니다. 어렵게 익힌 만큼 그 단어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영어 묵음에 대한 연구는 역사 언어학과 음운론 분야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영어 교육에서 묵음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어를 규칙으로 외우기보다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하면 훨씬 납득이 되고, 실제로 국제음성학회(IPA)에서도 발음 기호 학습을 언어 습득의 기초 도구로 권장하고 있습니다(출처: International Phonetic Association).
묵음을 처음 만났을 때의 답답함은 누구나 비슷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이유를 알고 나면, "원래 그래"라는 말 대신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됩니다. 영어 발음이 헷갈릴 때 IPA 기호를 하나씩 익혀두는 것, 생각보다 오래 도움이 됩니다.
참고: https://www.rd.com/article/silent-letters-english-langu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