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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불규칙 동사 (언어 화석, 강동사, 다국어 혼합과 유추)

by jaru0418 2026. 5. 9.

영어에는 약 180개의 불규칙 동사가 존재합니다. 처음 이 숫자를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걸 다 외워야 하나'보다 '이게 왜 이렇게 많이 살아남아 있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불규칙 동사는 설명하기 가장 까다로운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불규칙 동사가 영어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이 예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불규칙 동사의 정체: 언어 화석

영어의 불규칙 동사는 무작위로 생겨난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고대 영어(Old English) 시대의 문법 체계, 그중에서도 강동사(strong verbs)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강동사란 과거형을 만들 때 어미를 붙이는 대신 단어 내부의 모음 자체를 바꾸는 방식을 사용하는 동사를 말합니다. sing이 sang이 되고, begin이 began이 되는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반면 약동사(weak verbs)는 우리가 지금 '규칙 동사'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walk가 walked가 되듯 -ed 어미를 붙이는 방식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는 자연스럽게 단순화되는 방향으로 흘렀고, 대부분의 강동사는 약동사 형태로 전환되었습니다. 실제로 help의 과거형은 한때 holp였고, bake는 boke였습니다. 지금은 helped, baked로 완전히 바뀌었죠.

 

그런데 go, come, see, run 같은 동사들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이를 언어적 화석화(linguistic fossilization)라고 합니다. 화석화란 언어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특정 형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마치 수억 년 전 생물의 흔적이 암석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이 동사들은 천 년 전 게르만어 계열 문법의 흔적을 현재까지 품고 있습니다. 제가 이 개념을 처음 제대로 이해했을 때, 고목의 나이테를 보는 듯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강동사가 살아남은 이유: 사용 빈도의 힘

왜 하필 이 동사들이 살아남았을까요? 여기에는 꽤 명확한 패턴이 있습니다. 언어학 연구에 따르면, 사용 빈도가 높은 단어일수록 불규칙 형태를 유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출처: MIT 언어학 연구소). go, be, have, see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사용하는 동사들은 뇌가 규칙을 적용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기억하는 방식으로 저장됩니다.

 

심리언어학(psycholinguistics)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가 더 명확해집니다. 심리언어학이란 인간이 언어를 처리하고 습득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칙 동사와 불규칙 동사는 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규칙 동사는 문법 규칙을 적용해서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반면, 불규칙 동사는 마치 고유명사처럼 통째로 장기 기억에 저장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쓰는 동사일수록 불규칙 형태가 기억에 깊이 각인되고, 규칙화될 이유가 없어집니다.

 

반대로 드물게 쓰이는 동사들은 점점 규칙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dreamt가 dreamed로, learnt가 learned로 병행해서 쓰이다가 결국 규칙형이 우세해지는 것이 그 예입니다. 언어는 끊임없이 단순화되고 있지만, 그 흐름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가장 자주,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들입니다.

다국어 혼합과 유추: 영어가 더 복잡해진 사연

불규칙 동사의 기원을 고대 영어 내부에서만 찾으면 그림의 절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영어는 역사적으로 여러 언어와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9~11세기 바이킹의 침입으로 고대 노르드어(Old Norse)가 유입되었고, get, give, take 같은 동사들이 이 시기에 영어로 편입되었습니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프랑스어의 영향이 대거 들어오면서 기존 게르만어 동사 체계와 뒤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추(analogy)에 의한 변화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유추란 언어 사용자가 기존 패턴을 발견하고 새로운 단어에 적용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이 "runned", "comed"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유추의 결과입니다. 규칙을 이미 알고 있으니 모든 동사에 적용하려 하는 것이죠. 저도 교실에서 이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영어가 복잡한 것은 이처럼 단일 언어의 발전이 아니라 여러 언어 체계의 충돌과 선택적 생존의 결과입니다. 하나의 언어 안에 강동사 시스템, 약동사 시스템, 노르드어 기원 동사, 프랑스어 기원 동사가 뒤섞여 있으니, 일관된 규칙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출처: Oxford Learner's Dictionaries).


사실 저 자신도 원어민 친구와 대화하다가 불규칙 동사를 규칙형으로 잘못 말하고 교정받는 일이 꽤 자주 있습니다. 익숙한 단어인데 과거형이 불규칙인 줄 모르고 쓰는 경우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불규칙 동사는 어렵다기보다는 '낯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규칙에서 벗어난 모양이 눈과 귀에 자리 잡는 데 시간이 걸릴 뿐, 반복하면 결국 자연스러워집니다.

 

불규칙 동사를 단순히 외워야 할 예외 목록으로만 볼 것인지, 영어라는 언어가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흔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학습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의 지위를 갖게 된 지금, 불규칙 동사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단순화는 보편화를 위해 분명 유효한 방향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어 속에 새겨진 역사의 결이 지워진다면, 아쉬움도 남을 것 같습니다. went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사실 천 년 전의 언어를 함께 말하고 있으니까요.


참고: https://www.planetspark.in/english-grammar/why-english-has-so-many-irregular-ver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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