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나올 때, 귀를 쫑긋 세워도 도무지 못 알아듣겠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저도 영국 산업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다가 "내 영어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됐나" 싶어 좌절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경험이 계기가 되어 영어가 시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그리고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가면 실제로 의사소통이 가능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통시적 변화: 영어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언어학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언어 변화를 통시적 변화(diachronic change)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통시적 변화란, 한 언어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걸쳐 발음·어휘·문법 전반에 걸쳐 변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영어의 경우 이 변화의 폭이 특히 극적인데, 크게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고대 영어(Old English)는 대략 450년에서 1150년 사이에 사용된 언어로, 현대 영어 사용자에게는 사실상 완전히 낯선 외국어입니다. 중세 영어(Middle English)는 1150년에서 1500년 사이로, 초서(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중세 영어를 담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1500년 이후를 근대 영어(Early Modern English)로 분류하는데,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현대 영어 사용자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경우, 시대별 의사소통 가능성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850년대: 어렵지 않게 소통 가능. 다만 현대 어휘가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음
- 1650년대: 셰익스피어식 근대 영어 구간. 맥락을 짚어가며 어느 정도 이해 가능
- 1450년대: 중세 영어 후기로, 그 시대 영어에 대한 학습 필요
- 1000년대 이전: 고대 영어로, 현대인에게는 사실상 외국어 수준
재미있는 사실은 어휘 문제가 단순히 "단어가 없었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car'는 1300년대에도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바퀴 달린 탈것" 정도의 넓은 의미였고, 'train'은 기차가 아니라 드레스 자락처럼 길게 끌리는 것을 뜻했습니다. 즉, 단어는 있어도 의미가 달라 오히려 혼선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 상당히 신선하게 느꼈습니다. 단어를 안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계속 확인하게 되는 사실입니다.
발음 문제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음운 변화(phonological shift)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음소의 발음 방식이 체계적으로 달라지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영어에서는 대모음 추이(Great Vowel Shift)라는 대규모 발음 변화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현대 영어의 모음 발음이 중세 영어와 전혀 달라졌습니다. 쉽게 말해, 같은 글자를 써도 실제로 내뱉는 소리가 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 영어 사용자가 1400년대로 돌아가면 글자를 알더라도 귀로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법 화석: 현재에 남은 흔적들
과거 영어의 흔적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언어학에서 특히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문법 화석(grammatical fossil)"이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옛 문법 구조가 특정 표현 안에 굳어진 채 살아남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till death do us part(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나 "the powers that be(현재의 권력자들)", "if I were(내가 만약 ~라면)"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입니다. 이 표현들은 현대 영어에서 이미 사라진 가정법이나 주어-동사 변화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화석 표현을 발견할 때마다 저는 언어 속에서 시간을 읽는 느낌이 들어 꽤 설레곤 합니다.
그렇다면 과거 사람들은 현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립니다. 언어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단방향이므로 현대인이 과거 영어에 어느 정도 노출되어 있는 반면, 과거 사람들은 현대 어휘와 발음을 전혀 접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과거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기 더 어려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공감합니다.
언어 분기
또 하나 흥미로운 논점은 언어 분기(language divergence) 문제입니다. 언어 분기란 하나의 언어가 지리적·사회적 단절로 인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가 다른 것도, 분단 이후 남북한의 한국어가 점점 멀어지는 것도 모두 같은 원리입니다.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남북한 언어 분기 사례를 접했을 때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과 80여 년 만에 어휘와 억양이 이 정도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언어 변화 속도를 생각하면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거에는 소셜 미디어가 없었기 때문에 동떨어진 두 지역의 언어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달라졌습니다. 반면 지금은 미국과 영국이 실시간으로 서로의 영어를 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300년 뒤의 영어가 지금과 얼마나 달라질지는 과거와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도 디지털화가 언어 변화를 촉진한다는 시각과 오히려 표준화를 강화한다는 시각이 공존하는데(출처: 언어학회 Language 저널), 저는 단순히 변화의 속도를 떠나서 변화의 패턴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300년 뒤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영어 변종이 공존하는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언어를 파헤칠수록 시간이 말 속에 쌓여 있다는 느낌이 강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무심코 쓰는 표현 하나에도 수백 년의 역사가 녹아있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고대 영어나 중세 영어의 텍스트를 짧게라도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눈앞에서 언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