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에스페란토(Esperanto)를 실제로 사용하는 인구가 약 200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놀랐습니다. 인공 언어라는 게 영화 속 설정이나 마니아들의 취미 정도로만 여겼는데, 현실에서 수백만 명이 실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현실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보조 언어, 세상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
인공 언어(conlang, constructed language)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뉩니다. 여기서 콘랭(conlang)이란 자연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언어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 보조 언어(Auxlang):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한 공용 언어로 기획된 것
- 공학 언어(Englang): 언어 체계 자체를 실험하고 검증하기 위한 언어
- 예술 언어(Artlang): 소설이나 영화 같은 창작물의 세계관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
에스페란토는 이 중 보조 언어(Auxlang)에 해당합니다. 19세기 폴란드 의사 L. L. Zamenhof가 만든 이 언어는 처음부터 "통합"과 "평등"이라는 이념을 기반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자멘호프는 기존의 자연 언어들이 저마다 무거운 정치적·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다고 보았고, 인류에게 그런 짐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물은 꽤 실용적이었습니다. 어휘와 문법이 단순하고, 표현 방식이 로망스어군에서 상당 부분 차용되어 특히 유럽권 화자들에게 접근 장벽이 낮습니다. 에스페란토를 지지하는 분들은 배우기 쉬운 구조 덕분에 단기간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로망스어권에 편향된 어휘 체계가 결국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드는 게 아니냐는 지적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은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현재 200만 명이라는 실사용자를 확보한 인공 언어가 또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시도로 솔레솔(Solresol)도 있습니다.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 Jean-François Sudre가 만든 이 언어는 음악의 기본 음계인 도(do),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 시(ti) 일곱 음절만으로 모든 단어를 구성합니다. 음운 체계(phonological system)란 언어에서 의미를 구분하는 소리의 규칙 체계를 말하는데, 솔레솔은 그 음운 체계 자체를 음악 음계 7개로만 압축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입니다. 광범위하게 보급되지는 못했지만, 언어학적 실험이라는 관점에서는 여전히 의미 있는 선례입니다.
예술 언어, 세계관이 언어를 만들다
언어학을 전공하면서 가상 세계의 언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면 의외라는 반응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게임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상 언어를 파고드는 것이 너드스럽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로 들여다보니 그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도트라키어(Dothraki)는 HBO 드라마 《Game of Thrones》를 위해 언어학자 David J. Peterson이 구축한 예술 언어(Artlang)입니다. 기반 아이디어는 원작 소설가 George R. R. Martin이 제공했지만, 실제 문법 체계와 어휘를 완성한 것은 Peterson입니다. 이 언어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어려운 소리를 이어붙인" 것이 아니라, 도트라키 부족의 문화와 세계관이 어휘 선택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도트라키어에는 말(horse)을 가리키는 단어가 14개나 존재합니다. 기마 유목 문화에서 말은 생존과 직결된 핵심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감사합니다"나 "화장실"에 해당하는 어휘는 아예 없습니다. 도트라키 부족의 가치 체계에서 그런 개념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트라키어는 의미론(semantics), 즉 언어가 의미를 어떻게 분류하고 표현하는지의 체계가 문화와 긴밀히 연결된 사례를 잘 보여줍니다.
J. R. R. Tolkien이 만든 엘프어(Elvish)는 퀘냐(Quenya)와 신다린(Sindarin) 두 방언으로 나뉩니다. 각각 웨일스어와 핀란드어에서 음운적 영향을 받았으며,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한 수준의 어휘와 문법이 존재합니다. 클링온어(Klingon)는 《Star Trek》 시리즈를 위해 만들어진 언어로, 종족의 공격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목구멍 마찰음이 많이 배치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클링온어는 자체 문자 체계까지 갖추고 있으며, 현재 Duolingo에서 정식 강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콘랭거, 인공 언어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스페인에서 지내던 시절, 현지 친구가 자기가 쓰고 있는 소설을 위해 언어를 구상 중이라며 노트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음운 목록부터 기초 어휘까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언어 하나를 처음부터 설계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규모의 작업인지,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습니다.
사실 저도 한 번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언젠가는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세계관에서 쓰일 언어도 만들어보겠다고 덤볐다가 금방 포기했습니다. 음운 체계를 잡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했는데, 어휘 생성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습니다.
언어학자들이 언어 구축 시 음운 체계부터 시작하라고 권고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리의 패턴이 먼저 정해져야 그 규칙 안에서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결과적으로 그 언어가 하나의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언어학자 Edward Sapir는 국제어가 단순하고 논리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풍부하고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직접 만들어보려 했을 때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기준인지 체감했습니다.
미니언어(Minionese)를 보면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 미니언즈에 빠져서 그들의 언어를 찾아본 적이 있는데, 스페인어·이탈리아어·중국어 등에서 차용한 단어들이 섞여 있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묘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전 세계 관객이 중간중간 자기 언어처럼 들리는 단어에 반응하며 웃는 구조, 생각해보면 꽤 영리한 설계입니다.
콘랭거(conlanger)라고 불리는 인공 언어 창작자들이 언어를 설계할 때 일반적으로 거치는 단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음운 체계 설계: 어떤 소리를 사용할지, 자음과 모음의 목록을 정한다
- 형태론(morphology) 수립: 단어가 어떻게 변형되는지의 규칙을 정한다. 여기서 형태론이란 단어의 구조와 형태 변화를 다루는 언어학의 한 분야를 말한다
- 통사론(syntax) 설계: 단어들이 문장 안에서 어떤 순서로 배치되는지를 정한다. 통사론은 문장 구성 규칙을 다루는 분야다
- 어휘 구축: 음운 체계에 맞게 일관된 단어들을 생성한다
현재 콘랭 커뮤니티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언어 창작을 지원하는 다양한 도구와 자료가 공유되고 있습니다(출처: Language Creation Society).
인공 언어를 단순히 "만들어진 가짜 언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류가 언어라는 도구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창으로 볼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에스페란토의 200만 화자든, 도트라키어의 말을 표현하는 14어휘든, 그 안에는 누군가의 세상을 더 잘 표현하고 연결하고 싶었던 진지한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그 스페인 친구의 소설이 세상에 나온다면, 그 안에서 쓰이는 언어에도 집중해서 소설을 즐겨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포기했던 저의 콘랭 작업도, 이번에는 좀 더 공부하고 다시 시작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참고: https://www.globallanguageservices.co.uk/constructed-languages/